과거 코스닥은 ‘주가 조작의 온상’이라는 어두운 면과 ‘스타 CEO의 산실’이라는 명성을 동시에 지닌 야누스 같은 존재였다. 상장기업 1,000사 시대를 맞은 코스닥 시장이 배출한 ‘기린아’와 ‘미꾸라지’들을 짚어봤다.
올해로 11년째.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이 1,000개를 돌파했다. 벤처의 산실이라는 평가와 작전세력이 판치는 시장이라는 비난 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면서, 2001년 이후 처음으로 벤처기업에 투입된 투자금액이 1조 원을 넘어섰다.
코
스닥 시장의 활황 여부에 따라 말 그대로 벤처로 시작한 기업들이 황제의 자리에서 게이트의 온상이 되기까지 영광과 굴욕을 함께
경험했다. 휴맥스·NHN·다음 등 성공적 기업 운영으로 투자자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 기업도 있지만,
새롬기술·골드뱅크·한국디지탈라인 등 실망을 안긴 기업도 많았다.
2000년 3월10일 코스닥 주가지수가
2,834.4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후 그 해 말 650대로 떨어지는 급락 장세 속에서 주식을 담보로 은행 등에서 자금을
끌어들인 벤처기업들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은행 등 금융회사까지 덩달아 위기에 처했다.
벤처의 스타들 역시 코스닥 시장과 영욕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11년, 과연 누가 뜨고 누가 추락했는가?
1 오상수 (전 새롬기술 사장)
- 한 주 300만 원의 추억 남기고 코스닥에서 사라졌다 | ▶오상수 사장 오상수 당시 새롬기술 사장은 “진보적 네트워크 세상을 꿈꾼다”고 말했다. 그는 전화·모뎀·PC를 이용해 세상을 한데 묶고 싶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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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선 새롬기술 오상수 사장. 그는 한때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의 기린아였다. 1993년 7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산학과
석사 출신 동기생 4명과 의기투합해 각자의 주머니를 털어 자본금 1억 원으로 설립한 새롬기술이 창업 3년 만에 25배의 기록적
매출 성장을 올리며 단숨에 업계의 주목받는 신예로 떠올랐다.
첫 작품인 ‘새롬 팩스맨’은 한때 200만 카피 이상
팔려나가며 팩스 전송 SW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1997년 PC통신을 통해 무료로 공개한 통신 에뮬레이터 ‘새롬 데이타맨프로’는
격찬을 받으며 새롬을 일약 ‘한국의 마이크로소프트’로 격상시켰다.
당시 오 사장은 “진보적 네트워크 세상을 꿈꾼다”고 말했다. 그는 전화·모뎀·PC를 이용해 세상을 한데 묶고 싶어했다. 사람들이 마우스만으로 어디나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야침 찬 포부였다.
또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잘나가는 벤처기업 사장이어서 돈 좀 벌었겠다는 소리를 듣지만 아직 내집마련의 꿈을 못 이룬 보통 젊은이”라며 소탈한 면모를 보이고는 했다.
하
지만 1999년 8월 코스닥 시장에 상장하면서 오 사장과 새롬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새롬의 주가는 1999년 10월까지
4,500원에 불과했으나 12월 초에는 23만 원까지 올랐다. 불과 50여 일 만에 무려 4,900%의 상승률을 기록한 것이다.
새롬기술의 미국 자회사인 다이얼패드에서 인터넷 무료 전화 서비스를 한다는 것이 주가 급등의 재료였다. 새롬기술의
주가는 2000년 2월에는 30만8,000원까지 올라 코스닥 등록 6개월 만에 7만1,861%라는 경이적 상승률을 기록했다.
다이얼패드로 코스닥의 대표기업 자리에 등극한 새롬기술의 주가는 한때 300만 원까지 뛰어올라 삼성전자가 우스울 지경이었고, 오 사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 다음 가는 재산가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그
러나 그는 분식회계, 지분율 허위 공시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기에 이른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비리가 몰락의 원인이었다. 그
뒤로도 경영권 분쟁과 기업 위기에 대한 책임 문제로 현직으로 복귀했다 다시 물러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2 김진호 (전 골드뱅크 사장)
-타고난 주식의 귀재,  | ▶김진호 사장 김진호 사장이 창업한 골드뱅크는 ‘인터넷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투자자의 시선을 끌면서 코스닥 시장의 스타로 등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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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조작설 도마에 오르며 표류하다 퇴장
골드뱅크를 창업한 김진호. 그는 ‘인터넷 광고를 보면 돈을 준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투자자의 시선을 끌면서 코스닥 시장의 스타로 등장했다.
장외에서 시작된 그의 주식 세일즈는 장내에 진입한 뒤에도 계속됐다. 코스닥 등록 후 이 회사의 주가는 장밋빛 전망 속에서 잘나가기 시작했다.
코스닥에 등록된 이후 김씨는 주식 세일즈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기업사냥에 나섰다. 신용금고·농구단 등 굵직굵직한 사업을 벌이며 사세를 기하급수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1999
년 1월 초 주당 935원이었던 주가는 5월 말 3만1,200원으로 5개월 만에 3,230%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영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국회에서 정치자금 연루 사실이 터져 나오고, 주가 조작설의 도마에 오르며 결국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됐다.
당
시 김씨는 1999년 4월 골드뱅크 대주주인 전 중앙종금 회장 김석기 씨와 공모해 골드뱅크가 해외 전환사채를 발행해 외자를
유치한 것처럼 가장하는 수법으로 주가를 조작해 660억 원대의 시세차익을 챙긴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그러는
사이 골드뱅크도 2년여 동안 제대로 실적을 내지 못한 채 표류하면서 사업은 점차 위기를 맞게 됐다. 김진호 사장은 이 상황조차
‘기발한’ 방법으로 타개했다. 때마침 골드뱅크에 대한 적대적 M&A 시도가 나타나자 그는 얼마간 분쟁을 벌이는 듯하더니
돌연 경영권을 내놓고 일본으로 출국했다.
2년의 세월이 지난 2002년 그는 조용히 귀국했다. 얼마 후 검찰은 28억 원 상당의 골드뱅크 공금을 횡령하거나 배임한 혐의로 그를 구속 수감했다.
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김씨는 2002년 다시 증권가에 등장했다. 그는 ADSL 모뎀 기업 비젼텔레콤의 주식을 예약매매 방식으로 사들이며 증권가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많은 사람이 색안경을 끼고 그를 바라봤지만, 증권가에서 김씨는 여전히 ‘스타’였다. 비젼텔레콤 주식은 김씨의 인수 사실이 알려지면서 급등세를 탔다.
김
씨는 주가가 상승하자 골드뱅크 시절 활용하던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유상증자와 M&A가 다시 등장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장외기업보다 코스닥 기업 인수에 주력했다는 점. 이후 그가 인수한 기업들은 골드뱅크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유상증자가 잇따랐고 타법인 출자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기대와 달리 이들 회사의 주가는 증자가 시작된 후 급격히 하락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는지 김진호 씨는 이 회사들에서 곧 손을 떼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3 최유신 (전 리타워텍 회장)
-‘e-deal의 예술가’ 평가로 각광…  | ▶최유신 회장 투자자들이 코스닥에 진저리를 칠 때쯤 리타워텍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열풍을 불러일으킨 하버드대 출신 젊은이가 등장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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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금융기법’ A&D 허약함 드러내
투자자들이 코스닥에 진저리를 칠 때쯤 리타워텍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열풍을 불러일으킨 하버드대 출신 젊은이가 등장했다. 1970년생으로, 미국 이름은 찰스 스팩맨.
최석진 한국푸르덴셜생명보험 회장의 아들인 최유신 전 리타워텍 회장은 1997년 27세의 나이로 리타워인베스트먼트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했다. 그러고는 가스보일러용 환풍기 제조업체였던 파워텍을 인수해 대박을 냈다.
파워텍은 2000년 1월26일부터 3월16일까지 34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2000년 4월에는 주가가 150만 원을 넘어섰다. 1월만 해도 2만 원이던 주식이 석 달 만에 무려 80배가 뛴 것이었다.
파워텍을 거점으로 국내외 인터넷 벤처회사를 인수한다는 것이 리타워 그룹의 복안이었다. 파워텍은 한국기업을 인수하기 위한 전초기지였던 셈이다.
회
사 이름을 리타워텍으로 바꾸고 회장에 오른 최유신 전 회장은 자신의 투자기법에 관해 “미국에서는 상장회사를 사들인 뒤 업종전환
등을 통해 회사 가치를 높이는 투자가 흔하다”고 설명했다. 한동안 코스닥에서 열풍을 일으켰던 이른바
‘인수후개발(A&D)’이라는 새로운 금융기법의 등장이었다.
실제로 리타워텍으로 화려하게 등장한 최 전 회장은 미국 <포천>지가 ‘정보통신 투자(e-deal)의 예술가’로 극찬하는 등 한때 한국에 선진 금융기법을 도입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했다.
당
시 최 전 회장은 “아시아에 인터넷 제국을 건설하겠다”며 하버드 출신 후배들을 끌어들였고, 인터넷 관련 회사 인수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비즈투비즈·바트랜드·리눅스인터내셔널 등이 그가 사들인 회사였다. 공격적 인수합병(M&A)도 관심거리였지만 인수
방식도 특이했다. 인수자금은 대부분 전환사채를 발행해 조달했다.
허울 좋은 ‘선진 금융기법’ A&D또 인수한 회사의 대주주에게는 제3자 배정 방식의 유상증자로 파워텍의 주식 일부를 넘겨주는 한국식 주식 교환 방식을 활용했다. 하지만 ‘선진 금융기법’이라던 그의 재주 넘기도 오래 되지 않아 실체를 드러냈다.
리
타워텍은 2000년 매출액 2억 원에 당기순손실이 무려 1조5,150억 원이나 됐다. 매출액의 7,000배 이상에 달하는 적자를
낸 것이었다. 자회사들도 제대로 이익을 내는 곳이 거의 없었다. 무려 1조4,000억 원을 쏟아 부어 인수한 아시아넷 역시
적자투성이였다.
국세청은 2003년 1월 리타워텍에 453억 원의 세금을 부과했지만, 그로부터 두 달 뒤 리타워텍은 감사의견 거절로 코스닥에서 퇴출됐다. 퇴출 직전 리타워텍의 주가는 20원까지 떨어졌다.
4 정현준 (전 한국디지탈라인 회장)
-잊을 만하면 터지는 ‘코스닥 게이트’…‘한국판 손정의’도 침몰 | ▶정현준 회장 이때부터 사채시장에서는 “정현준은 끝났다”는 말이 나돌았다. 얼마 뒤 그는 주가 시세 조종 혐의로 금감원의 조사를 받았고, 이어 서울지검에서 그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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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슷한 시기에 비슷한 사건으로 또 한 번 코스닥 시장 참가자들을 절망에 빠뜨린 인물이 정현준 전 한국디지탈라인 회장이다. 정 전
회장은 동방금고의 거액 불법 대출과 회사의 부도로 몰락하기 전까지 기업 인수합병(M&A)의 귀재로 불렸다.
대
학 졸업 후 선배에게 빌린 돈 3,000만 원으로 M&A 시장에 뛰어든 그는 벤처 열풍과 코스닥 시장 활황에 힘입어 3년
만에 수백 억 원대의 재산을 일궈냈다.M&A에서 거둔 막대한 차익을 바탕으로 금융기관까지 인수한 정씨는 한국디지탈라인
회장에 취임해 ‘한국의 소프트뱅크’를 표방하며 인터넷 재벌을 꿈꿨다.
하지만 정현준은 온갖 무리수와 불법 끝에 결국 참담하게 몰락했다. 젊은 벤처기업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 사업 행태가 낳은 실패였다.
그
는 2000년 한국디지탈라인의 전신인 웹인터내셔날의 윤석민 사장으로부터 회사 지분 30.89%를 싼 값에 인수했다. 이후
전환사채(CB) 30억 원을 발행해 KDL창업투자 등 각종 인터넷 및 정보통신 벤처기업을 인수하며 업계에 급속히 두각을
드러냈다. 액면가 500원인 디지탈라인 주가는 4만6,000원까지 치솟아 떼돈을 벌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새한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가자 ㈜새한이 갖고 있던 디지탈임팩트 지분 13%를 인수해 ‘한국판 손정의’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렇게 벤처 투자로 돈을 번 정씨는 대신신용금고와 동방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해 금융업에 진출했다.
그
러나 정씨는 진정한 금융인이 아니었다. 법규상 상호신용금고는 출자자 대출이 금지돼 있으나 105억 원을 불법으로 대출받았다.
동방금고는 또 직원들과 투자조합이 갖고 있는 평창정보통신 주식 20만4,689주를 시세보다 3배가량 비싼 1만1,000원에
매입하는 형식으로 회사 자금 15억 원을 빼돌렸다.
정씨는 이와 함께 대신금고 소유의 평창정보통신 주식 33만 주를 무단 인출했다. 회사 재산과 개인 재산을 구분하지 못한 행위였다
그
가 불법의 유혹에 빠져든 이유는 증시 붕괴와 무리한 사업 확장 때문이었다. 정씨는 이미 대규모 지분을 가지고 있던 평창정보통신의
경영권 안정을 위해 주식 50만 주를 주당 1만5,000원에 공개 매수한다고 선언했다. 당시 장외주가는 9,000원 대로 쉬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정씨는 소액주주로부터 50만 주를 일단 인수했으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대금 지급을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두 번에 걸쳐 50%씩 매입대금을 지급하기로 했으나 1차 시한을 지키지 못했고, 대신 이 주식을 담보로
사채시장에서 급전을 끌어다 썼다.
이때부터 사채시장에서는 “정현준은 끝났다”는 말이 나돌았다.얼마 뒤 그는 KDL의
주가 시세를 조종한 혐의로 금감원 조사를 받았고, 이어 서울지검에서 그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정현준게이트’가 터져
나왔고, ‘한국의 손정의’를 꿈꾸던 정현준은 결국 불법 사업가로 전락했다.
5 장흥순 (전 터보테크 회장)
-‘진정한 벤처 1세대’ 선두로 나섰다 분식회계 등 파문에 추락 | ▶장흥순 회장 주주들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탄탄한 기술력과 내실 있는 사업 내용을 믿은 소액주주들은 구명운동을 벌이며 장 회장을 지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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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의 시대가 저물면서 한동안 코스닥은 정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2005년 벤처기업협회장을 맡고 있던 장흥순 터보테크 회장이 분식회계 혐의로 사법처리되면서 코스닥은 또 한번 큰 충격에 휩싸였다.
장
흥순 터보테크 회장은 변대규 휴맥스 사장, 안철수연구소의 안철수 의장 등과 함께 ‘진정한 벤처 1세대’의 선두주자였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과 박사과정 시절이던 1988년 공장자동화(CNC) 기술을 응용한 제품과 정보통신 단말기
등을 생산하는 터보테크를 설립해 연매출 1,000억 원에 육박하는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창업 당시 무작정 은행 지점을 찾아가 “카이스트 박사 만드는 데 초등학교부터 투자액을 따지면 1억5,000만 원이 든다. 우리 회사 박사 2명을 담보로 3억 원만 빌려달라”며 지점장을 설득해 대출받은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1995년 벤처기업협회 창립 당시 부회장을 맡았고, 2000년에는 회장직을 맡았다. 10년간 벤처기업가들의 ‘맏형’ 노릇을 했던 셈이다.
또
코스닥위원회 위원, 코스닥등록법인협의회 부회장, 감사원 아이티(IT) 감사 자문위원,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등으로
대외활동에도 열정적이었고, 1998년에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차세대 지도자 100인에 선정되는 등 개인적 능력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2003년부터는 휴대전화 단말기 제조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혀 투자를 대폭 늘리면서 적자가 심화됐고, 이를
감당하기 위해 결국 분식회계에까지 손을 댔다. 장 회장은 2005년 9월 CD를 이용해 700억 원대의 분식회계로 회사의 적자
규모를 줄인 사실이 드러나 결국 구속됐다.
하지만 그는 과거의 인물들과는 달랐다. 우선 주주들이 그를 버리지
않았다. 탄탄한 기술력과 내실 있는 사업 내용을 믿은 소액주주들은 구명운동을 벌이며 장 회장을 지원했다. 각계 인사들도 투자
형식으로 터보테크에 자금을 투입하며 그를 도왔다. 백종진 당시 한글과컴퓨터 사장, 이강환 대한생명 전 고문, 신선호 전
센트럴그룹 회장, 신승남 전 검찰총장 등이 그의 우군이었다.
그는 지난 6월 경유차 매연 저감 장치를 발표하며 재기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재기라기보다 터보테크를 도와주는 역할 정도로 봐 달라”며 전면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다.
6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사장)
-‘아래아한글1.0’ 상용화로 급성장…‘한국판 빌 게이츠’의 몰락 아쉬워  | ▶이찬진 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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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과 열정을 갖추고도 꽃을 피워 보지 못한 채 아쉽게 뒤안길로 사라진 벤처 스타는 또 있다. ‘한국의 빌게이츠’라고 불렸던 이찬진 전 한글과컴퓨터 사장.
1989년 서울대 후배 3명이 공동 개발한 ‘아래아한글1.0’의 상용화에 성공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한글과컴퓨터는 1993년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 최초로 매출액 100억 원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전 사장은 1996년 탤런트 김희애 씨와의 결혼에 이어 1997년에는 당시 신한국당 직능대표로 국회의원이 됨으로써 사업 외적 측면에서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CEO’로 부상한다.
그러나 이 전 사장이 이처럼 사업 외적 측면에서 주목받는 사이 그가 설립한 한글과컴퓨터사는 당시 만연했던 불법 복제와 도스에서 윈도로의 컴퓨터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
전 사장과 한글과컴퓨터의 가장 큰 실패 원인은 당시 난무하던 불법 복제. 그러나 불법 복제가 한글과컴퓨터와 이 전 사장의 실패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불법 복제의 피해가 크기는 하지만 다른 소프트웨어 업체도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불법복제 관행에 무너져이
에 대해 당시 소프트웨어 업계의 한 관계자는 “불법 복제는 어차피 막기도 힘들지만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는 구실도 한다”며
“아래아 한글 역시 개인 사용자의 불법 복제 방지보다 기업시장을 적극 개척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한글과컴퓨터가
변화하는 시장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도 문제였다. 이 전 사장은 위기가
닥치자 한컴네트·한컴서비스 등 사업다각화를 위한 별도 법인을 세우며 본업보다 인터넷 사업과 교육사업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다.
주력 분야를 도외시한 사업다각화는 결국 주력분야에서의 시장 변화에 대한 대응을 더디게 만들었고 한글과컴퓨터의 몰락을 앞당겼다
이찬진 사장은 이후 드림위즈를 설립해 옛 영화를 되찾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과는 너무 멀어져 버린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드림위즈는 지난해 코스닥 상장을 시도했으나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다.
7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
- 게이트 시대 아닌 기술기업 시대 연 주인공… 최근 성장세 주춤 | ▶이재웅 사장 다음은 1995년 2월 자본금 5,000만 원, 이재웅 사장을 포함한 직원 3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료 웹메일인 ‘한메일’서비스를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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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흥순 사장과 이찬진 사장의 쇠락은 코스닥이 진정한 벤처기업들의 요람으로 거듭나는 전환점이었다. 그 뒤 코스닥에서는 허황된
돈놀이가 대부분 자취를 감췄고, 기술력을 갖춘 기업들이 새로운 스타로 등극하게 된다. 대표적 예가 이재웅 다음커뮤니케이션 사장의
부상이었다.
‘네티즌’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인터넷 사용자들이 대부분 인터넷이라는 것을 처음 맛보게 된 것이 ‘한메일’이라는 이메일 서비스를 통해서였다.
이재웅 사장이 26세의 나이에 인터넷을 사업에 접목하겠다며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하고 1997년 한메일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일반인들에게 인터넷이 실생활에 활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은 1995년 2월 자본금 5,000만 원에 이재웅 사장을 포함한 직원 3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무료로 웹메일을 쓸 수 있는 ‘한메일’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과거 PC통신 중심이던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인터넷으로 급속히 이전하기 시작했다.
다음이 코스닥에 등장한 것은 1999년 말이었다. 당시 공모가는 ‘겨우’ 1만 원. 태생부터 거품이 잔뜩 끼었던 무늬만 벤처와는 출발부터 달랐던 것이다.
2000
년 3월 이재웅 사장은 온라인 쇼핑몰(디앤샵)을 오픈하면서 인터넷 포털에서 시작한 사업 영역을 쇼핑 분야로까지 넓힌다. 그 해
7월에는 다음금융플라자를 오픈하면서 증권·보험 서비스와 함께 부동산 등 모든 재테크 정보를 한꺼번에 제공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e메일 서비스로 시작해 쇼핑과 함께 재테크 정보까지 제공하는 종합 전자 상거래 영역으로 사업을 늘린 것이다.
2003
년에는 각 언론사의 뉴스와 함께 다음이 독자적으로 뉴스를 생산해 네티즌에게 제공하는 ‘미디어 다음’을 처음으로 오픈했다. 이로
인해 이재웅 사장은 인터넷 사업에 이어 언론시장에도 직접 뛰어드는 것 아니냐는 세간의 의혹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은 이메일에서 카페, 검색으로 급속히 바뀌는 인터넷 사용자들의 수요에 대응하지 못하고 과다하게 사업 영역을 넓혀 과거만큼의 명성을 유지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웅 사장은 2006년부터 국내외 비핵심 사업 매각 등 서서히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그 동안 벌여 놓았던 연예기획
사업과 온라인 음반, 온라인 여행사업에서는 이미 손을 뗐고, 다음다이렉트자동차보험도 정리 절차를 밟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재웅 사장은 12년간 책임져온 다음의 경영 일선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최대주주로서의 이사회 멤버 지위만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
는 그 동안 “빌 게이츠 회장처럼 현업에서 한 걸음 물러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싶지만 투자자들이 용납하지 않는다. 회사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며 경영에서 손을 떼고 싶다는 심정과 이를 실현할 수 없는 현실의 괴리를 토로한 바 있다.
다음의 설립자로서, 국내 인터넷 사업 역사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재웅 사장과 다음은 한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하려면 어떤 것에 도전해야 하는지, 무엇은 하면 안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8 변대규 (휴맥스 사장)
-셋톱박스 자체 브랜드 수출로 역량 축적… ‘다음 카드’로 코스닥 이끌어야 | ▶변대규 사장 변 사장은 대학 교수나 연구원의 길을 버리고 산업현장을 택했다. 연구논문만 중시하는 기존 대학의 가치관을 깨고 벤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지도교수의 영향이 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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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터넷에 이재웅 사장이 있다면 오프라인에는 변대규 휴맥스 사장이 있다. 셋톱박스가 주력 상품인 휴맥스는 1997년 코스닥에
상장했을 때 매출액이 142억 원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40배 이상 매출 규모가 커졌다. 덕분에 휴맥스는 대기업 계열사까지 포함한
코스닥 전체 기업 1,000개 중 가장 규모가 큰 기업 중 하나다.
변 사장은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박사 과정에 다니던 1989년 서울 봉천동 낙성대 뒤편의 작은 사무실에서 건인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했다.
1996
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유럽 규격 디지털 위성 셋톱박스를 개발했고 수출에 나섰다. 외국에서 100~200대의 소량 주문도 받고,
‘휴맥스’라는 자체 브랜드로 시장을 개척하는 등 기존 기업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셋톱박스 시장에 접근했다.
변 사장에게는 항상 ‘젊다’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우선 세계경제포럼 아시아 차세대 지도자 선정(2002), 한국공학한림원 ‘젊은 공학인상’ 수상(2002) 및 최연소 정회원 가입(2005) 등 차세대 주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그가 창업 전선에 나선 지 벌써 20년이 다 돼간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제 그에게서 ‘젊음’ ‘차세대’라는 꼬리표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변 사장은 대학 교수나 연구원의 길을 버리고 산업현장을 택했다. 연구논문만 중시하는 기존 대학의 가치관을 깨고 실제 사업화에 도전하는 벤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지도교수의 영향이 컸다.
창
업 초기에는 학생들로만 구성돼 우여곡절도 많았다. 당시 자본금 마련을 위해 기술신용보증기금에 5,000만 원짜리 보증서를
신청하러 갔다가 집 등기부등본을 가져오라는 말에 “저는 하숙생인데요”라고 답해 창구 직원을 당황하게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휴맥스는 수많은 굴곡을 겪었지만 다행히 18년이 지난 지금 국내 IT 벤처 신화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창업 당시 친구들과 5년 후 매출 100억 원, 10년 후 매출 1,000억 원을 목표로 삼았는데 두 가지 모두 달성하는 데 딱 1년씩만 늦었으니 성공한 셈이죠.”
‘벤처’ 넘어 중견기업 진입이
처럼 휴맥스는 차세대가 아닌 현재의 대한민국 이공계를 이끌어 가는 ‘주류’로 들어왔다. 그도 인정하듯 휴맥스는 이미 벤처기업의
단계를 넘어 중견기업으로 진입했다. 18년 역사에 연 매출 6,500억 원, 6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회사를 언제까지
벤처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대한민국 이공계는 변 사장을 벤처 신화의 주인공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수많은 벤처 1세대 경영인이 무대에서 사라진 지금 그가 지닌 의미는 성공한 경영자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이공계는 그가 ‘제2의 휴맥스’를 이끌어 내는 지향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렇다면 10년 뒤 휴맥스의 모습은 어떨까? 변 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중견기업으로 진입했으니 삼성·LG전자처럼 전 세계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는 기업이 되고 싶습니다. 최소한 ‘새끼 대기업’ 정도는 돼야죠.”
9 안철수 (전 안철수연구소 사장)
- 코스닥 늦깎이로 스타덤…정도경영의 진수 보였다는 평 | ▶안철수 사장 남들은 회사 설립신고서의 도장이 채 마르기도 전에 코스닥으로 달려갔지만, 안철수 사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1997년 미국 맥아피사의 1,00만 달러 인수 제의도 한마디로 거절한 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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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닥에서 슈퍼스타들이 잇달아 등장하는 동안 먼 발치에서 이를 바라만 보고 있던 이가 있었다. 코스닥은커녕 벤처기업이라는 말도 생겨나기 전에 이미 온 국민이 다 아는 기업인이 돼 있던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당시 사장이었다.
안 전 사장은 1995년 자신이 개발한 백신 프로그램 ‘V3’를 바탕으로 안철수바이러스연구소를 설립한 후 오로지 백신 프로그램 개발에만 매달려 안철수연구소를 오늘날 국내 최대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일궈냈다.
특히 안 전 사장은 소프트웨어 불법 복제로 안철수연구소의 연매출이 1억여 원에 불과할 때도 ‘V3’를 1,000만 달러에 팔라는 외국계 자본의 제의를 거절해 화제를 모았다.
또 벤처 거품으로 ‘컴’자만 붙어도 수십억 원이 쏟아지던 2000년에도 거품 투자를 받지 않겠다며 코스닥 입성을 마다하며 내실 다지기에 힘썼다.
그 결과 안철수연구소는 지난해 매출 315억 원, 영업이익 102억 원에 부채비율 19%에 불과한 소프트웨어 업계 최고의 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우직하게 ‘정도 경영’을 강조하면서 ‘한 우물’만 판 결과다.
10년 전 누군가가 안철수 사장에게 회사 설립을 권했다.
“저는 사람 만나는 것보다 혼자 책 읽고 글 쓰고 프로그래밍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회사를 만들어도 제가 좋아하는 일만 계속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곧 돌아왔다.
“당연하죠. 사장 위에는 아무도 없잖습니까? 당연히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습니다.”
안
사장은 그 한마디에 힘을 얻어 회사를 세웠다. 하지만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장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별난 의사 안철수’는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것이 1995년 3월15일의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 말한 대로 대학교수에나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사람과 어울리기보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심리나 행위에 더 관심이 있었다.
2001
년 9월 안철수 전 사장은 늦깎이로 코스닥에 데뷔했다. 남들은 회사 설립신고서의 도장이 채 마르기도 전에 코스닥으로 달려갔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1997년 미국 맥아피사로부터의 1,000만 달러 인수 제의도 한마디로 거절한 그였다.
괴짜
의사에서 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2005년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회사 설립 10주년 기념식 자리에서 안철수연구소의
사장직을 내던지고 미국 유학을 떠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졸지에 ‘안철수 없는 안철수연구소’가 된 회사는 그의 사퇴 소식에
주가가 폭락하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외국에는 창업자의 성을 딴 기업은 많지만 경영은 창업자가 아닌 전문경영인이 맡는다”며 가족이 사는 미국으로 떠났다.
10 이해진 (NHN 최고전략책임자)
- 삼성SDS 사내 벤처 1호 소사장으로 시작해 ‘네이버 신화’ 이뤄 | ▶이해진 최고전략책임자 네이버의 초기는 가시밭길이었다. 웹 사이트를 열기는 했지만 돈을 벌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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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닥 시장의 시가총액 1, 2위를 다투는 NHN은 이해진 최고전략책임자가 1999년 창업한 네이버컴이 전신이다. NHN의 또 다른 한 축인 한게임 커뮤니케이션은 김범수 전 대표가 1998년 PC방에서 창업한 인터넷 게임업체다.
두 회사는 2000년 7월 합병하면서 검색과 게임을 조합한 새로운 사업 모델을 만들었다. NHN은 벤처 거품이 꺼지고 난 뒤인 2002년 10월 코스닥 시장에 등록했기 때문에 벤처 광풍의 후유증을 피했다.
서른 살의 열혈 청년 이해진 연구원이 네이버를 처음 창업한 시기는 1997년 11월. 불과 10년도 안 됐다. 당시 IMF 쇼크로 한국이 휘청거리던 때였다.
서
울대 컴퓨터공학과, KAIST 전산학 석사를 거쳐 삼성SDS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이해진 과장은 회사에서 검색엔진
부문을 떼어내 별도 회사를 세우자고 경영진을 설득했다. 설득은 성공했고, 이 과장은 삼성SDS 사내 벤처 1호 소사장이라는
직책으로 6명의 창업 동지와 함께 네이버를 설립했다.
모든 기업이 그렇듯 네이버의 초기는 가시밭길이었다. 웹 사이트를 열기는 했지만 돈을 벌 뾰족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 1999년에는 삼성SDS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와 대기업의 보호막도 사라졌다.
이해진 책임자는 “당시 광고영업도 안 되고 해서 인터넷 광고를 많이 게재하던 모 일간지 웹사이트의 광고 담당자를 만났더니, 이 담당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네이버는) 비전이 없다며 사업을 접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10
년 전에는 100만 원짜리 광고를 아쉬워했지만 오늘날의 네이버는 화려하기만 하다. 네이버의 시가총액은 최근 7조 원을 돌파해
웬만한 재벌 기업을 뛰어넘었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당연히 1등이다. 또 하루에 네이버 사이트를 찾는 고객은 평균 1,600만
명, 해외 법인까지 합치면 2,500만 명에 이른다.
김완진 객원기자
월간중앙
2007-11-02 오전 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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